사흘은 길었다.
첫날 루크는 편지를 썼다.
어머니께. 시험은 무사히 치렀습니다.
거기서 펜이 멈췄다. 무사히가 아니었다. 종이를 접어 넣었다.
둘째 날에도 썼다.
시험은 끝났습니다. 결과는 사흘 뒤에 나옵니다.
두 문장이 전부라 부치기가 민망했다. 그것도 접어 넣었다.
셋째 날에는 쓰지 않았다.
대여 지팡이는 둘째 날 오후에 반납했다.
창구의 나이 든 직원은 물푸레나무 몸체를 받아 들고 촉매석을 손끝으로 한 번 문질렀다. 흐린 회색이 조금 더 흐려져 있었다.
"쓰긴 썼구먼."
"…네."
"합격하면 공방부터 가시게. 규격품은 규격품일 뿐이야. 자기 파장에 맞춘 걸 한 번 쥐어 보면, 이게 얼마나 남의 물건이었는지 알게 되지."
루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 말이 따라왔다. 남의 물건. 여섯 해 동안 아버지의 지팡이도, 마이라의 목제 지팡이도, 어제의 대여품도 전부 남의 것이었다. 자기 것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가방 옆 주머니를 열었다. 손잡이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새겨진 작은 목제 지팡이가 그대로 있었다.
'루크'
루크는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도로 꽂았다.
발표는 나흘째 아침 여덟 시였다.
루크가 정문에 도착한 건 일곱 시가 조금 넘어서였는데, 이미 사람이 있었다. 겨울 안개가 발목까지 깔려 있었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서 발 구르는 소리만 났다. 입김이 안개에 섞여 어디까지가 사람의 숨인지 알 수 없었다.
정문 안쪽의 게시판은 생각보다 낡아 있었다. 검게 그을린 나무판에 못 자국이 수백 개는 되어 보였다. 몇십 년치 명단이 붙었다 떨어진 자국이었다.
여덟 시 정각, 학원 직원 둘이 사다리를 세우고 종이를 붙였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렸다.
루크는 뒤로 밀려났다가 다시 들어갔다. 앞줄에서 누군가 짧게 숨을 들이켰고, 옆에서는 웃음소리가 났고, 조금 뒤에서는 종이를 구기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전부 달랐다.
명단은 순위순이었다.
1. 에드윈 아쉬크로프트 — 수석 · 전액 장학 · 신입생 대표
2. 글레아
3. 칼라 베른슈타인
루크의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8. 블레이 — 실기 설비 파손 감점 · 입학 후 근신 30일
더 아래로.
이름이 많았다. 스물, 서른. 여기까지 없으면 떨어진 거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41. 루크 에버라이트 플라멜 ※
숫자보다 뒤에 붙은 표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작고 검은 별표 하나. 명단 전체에서 그것이 붙은 이름은 루크 하나뿐이었다.
"…합격 축하해요."
루크가 돌아봤다.
칼라가 반 발짝 뒤에 서 있었다. 챙이 넓은 마녀모자를 다시 쓰고 있었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은 자세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 네. …칼라 씨도요. 3위요. 대단해요."
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서 모자챙이 흔들렸다. 그 아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3위면요."
"네?"
"3위면, 안 되는 게 있었거든요."
말끝이 흐려졌다. 루크는 무슨 뜻인지 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잠깐 가만히 있었다. 물어도 될 것 같지 않았다.
칼라가 먼저 화제를 옮겼다.
"…그건 뭐예요?"
그녀의 시선이 명단 위, 루크의 이름 옆에 가 있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별표."
"네."
칼라는 한 걸음 다가와 명단을 위에서 아래까지 훑었다. 눈을 깜빡이지 않는 그 시선이었다. 삼 초쯤 지나서 그녀가 말했다.
"…없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네."
"저도 처음 봐요."
그 말이 루크에게 이상하게 걸렸다. 이 사람은 시험장에서 차단선이 안쪽으로 휘는 것까지 알아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모른다고 했다.
"이 몸이 8위래."
목소리는 옆에서 왔다. 블레이가 손에 종이 한 장을 구겨 쥔 채 서 있었다. 처분 통지서였다. 붉은 스카프는 그대로였고, 표정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신 삼십 일. 입학하자마자 방에 갇힌대."
"…괜찮아요?"
"뭐가."
"8위요."
블레이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명단 쪽으로 턱을 들었다.
"방출은 1등이었어."
"…네?"
"부문별 표에 붙어 있더라. 방출 측정 1위, 블레이. 근데 종합은 8위야."
그는 구긴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제일 세게 쐈는데 제일 세게 깎였어. 웃기지."
말은 그렇게 했는데 목소리에 열이 없었다. 화를 내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루크가 잠깐 그 얼굴을 봤다.
블레이는 자기 오른쪽 손목을 보고 있었다.
"…손목, 계속 보시네요."
"그날 이후로 백스물세 번 봤다."
"세셨어요?"
"안 세면 뭐 하고." 블레이가 손을 내렸다. "너는 뭐야. 그 별표."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네."
"…쳇." 블레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 진짜 이상한 놈이네."
어제 들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어제와는 어딘가 다르게 들렸다.
게시판 왼쪽 끝에는 사람이 더 몰려 있었다.
에드윈이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축하 인사가 사방에서 쏟아졌고, 그는 그 하나하나에 정확히 같은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름을 아는 상대에게는 이름을, 모르는 상대에게는 예를 갖춘 짧은 문장을 돌려주었다.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흩어진 뒤, 루크가 다가갔을 때에도 에드윈은 여전히 게시판 앞에 서 있었다.
"…축하드려요."
에드윈이 돌아봤다. 낮의 그 눈이었다.
"루크 군. 감사합니다. 군의 합격도 축하드립니다."
"저는 41위인데요."
"정원은 육십입니다. 안에 있으면 합격입니다."
너무 담백해서 오히려 위로가 됐다. 루크는 조금 웃었다가, 에드윈의 시선이 자기 이름 쪽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명단 옆에 따로 붙은 부문별 표였다.
이론 1위 — 에드윈 아쉬크로프트
실기 방어 1위 — 에드윈 아쉬크로프트
실기 방출 — (중위권, 순위 없음)
"…뭘 보고 계세요?"
에드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 박자 멈추는 그 버릇이었다.
"이 자리를 제 이름으로 받은 것이 맞는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네?"
"방벽은 제 것입니다. 이론도 제 것입니다." 그가 손을 들어 세 번째 줄을 짚었다. "그런데 이건 제가 한 번도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아서 나온 점수입니다."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예."
에드윈의 손이 내려갔다.
"…필요 없다고 말해 온 것이, 사실은 못 한다는 뜻은 아니었는지. 오늘 처음 생각했습니다."
루크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위로를 하기에는 상대가 수석이었고, 동의를 하기에는 자기가 41위였다.
그때 에드윈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칼라가 서 있었다.
"베른슈타인 양."
칼라가 고개를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실기 조합 부문 1위로 알고 있습니다."
"…네. 축하드려요. 수석."
그게 전부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정확히 한 번씩 고개를 숙이고, 그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마찰이 없었다. 목소리를 높인 사람도 없었다.
루크는 그 짧은 예의를 옆에서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 무거운지는 몰랐다.
아홉 시가 넘자 사람들이 대부분 빠졌다.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게시판 앞에는 루크 혼자 남았다. 그는 다시 자기 이름 옆의 별표를 봤다. 아침보다 더 작아 보였고, 그래서 더 잘 보였다.
"이 판, 백 년쯤 됐대요."
루크가 돌아봤다.
아델리아가 게시판 옆에 서 있었다. 명단이 아니라 명단이 붙은 나무판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손끝이 못 자국 하나를 따라가고 있었다.
"…순위는 안 보세요?"
"봤어요. 58위요."
너무 태연해서 루크가 되물을 뻔했다.
"괜찮으세요?"
"정원이 육십이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나무판을 봤다. 어제 낡은 문틀에 손을 대고 있던 것과 똑같은 자세였다.
"이 못 자국이요, 아래쪽이 더 촘촘해요. 옛날에는 명단을 더 작게 붙였다는 뜻이거든요. 정원이 늘었다는 거죠. 언제부터 늘었는지 알면—"
"저기."
"네."
"…죄송한데, 이거요."
루크가 자기 이름 옆을 가리켰다.
아델리아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아주 잠깐, 표정이 달라졌다.
"아. 별도 통지네요."
"…아세요?"
"등록처 뒤에 게시 규칙표가 붙어 있었어요. 도면 옆에요."
루크는 어제 글레아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뒤집혀 있었죠.
"채점이 확정되지 않았을 때 붙이는 표기예요. 합격은 확정인데, 과제 하나가 아직 점수가 없다는 뜻이요. 학사위원회가 따로 서한을 보내요."
"…왜 점수가 없어요?"
"규칙표에 네 가지가 적혀 있었어요."
아델리아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채점 불능. 규격 외 결과물. 이의 제기 계류."
세 번째에서 잠깐 멈췄다가, 네 번째를 폈다.
"부정 의혹."
루크의 얼굴이 굳었다.
아침 내내 41이라는 숫자를 붙들고 있었다. 합격했다는 것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별표 하나에 네 가지 가능성이 들어 있었고, 그중 하나는 그가 무언가를 속였다는 뜻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알아요."
아델리아가 바로 말했다. 너무 빨라서 루크가 오히려 놀랐다.
"네 가지 중에 어느 건지는 서한에 적혀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표기, 마지막으로 붙은 게 십이 년 전이래요."
"…그것도 규칙표에요?"
"아래에 연도가 적혀 있었어요. 잘 안 지워지는 잉크로요."
루크는 명단을 다시 봤다. 십이 년 동안 아무도 받지 않은 표시였다.
"…실기에서 뭘 만드셨어요?"
아델리아가 물었다.
루크는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모르는 걸 만들 수 있어요?"
그 물음에는 비웃음이 없었다.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목소리였고, 그래서 대답하기가 더 어려웠다.
"…기초 회복 포션을 만들어야 했는데, 재료 하나가 불량이었어요. 그대로 쓰면 터질 것 같아서 배합을 바꿨어요. 거기까지는 제가 한 거예요."
"거기까지는요."
"…마지막에요." 루크가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이 먼저 움직였어요. 왜 그렇게 했는지는 저도 몰라요. 배운 적이 없어요."
아델리아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겨드랑이에 낀 검은 책을 조금 고쳐 안았다. 어제와 똑같은 동작이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저도 그래요."
"네?"
"이 책이 왜 저한테 열렸는지 몰라요. 다른 사람한테는 안 열렸고, 저한테는 열렸어요. 저는 그때 아홉 살이었고,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루크가 그녀를 봤다.
"모르는 채로 계속 가는 게… 안 무서우세요?"
아델리아는 잠깐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무서운 건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럼요?"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녀가 나무판에서 손을 뗐다.
"모르는 건 아직 안 찾은 거잖아요. 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남아 있는 거예요."
창구는 정문 안쪽 오른편에 있었다.
"수험번호 사백칠. 별도 통지 대상입니다."
직원이 서랍에서 서한을 꺼냈다. 접힌 종이 위에 짙은 남색 봉랍이 찍혀 있었다. 학원 문장이었다. 루크는 그런 봉랍을 실물로 처음 봤다.
"이 자리에서 열어 보셔도 됩니다."
루크는 밖으로 나와 게시판 옆 담벼락에 기대서서 봉랍을 뜯었다.
수험번호 407. 루크 에버라이트 플라멜.
귀하의 실기 제3과제 결과물에 대하여 학사위원회 심의를 개시함.
소집: 내일 오전 아홉 시, 제3연구동 심의실.
지참물: 없음.
짧았다. 사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네 가지 중 어느 것인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루크는 마지막 줄을 두 번 읽었다.
지참물: 없음.
대여 지팡이는 이미 반납했다. 어차피 가져갈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한 줄이 이상하게 걸렸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는 것은, 가져와도 쓸 데가 없다는 뜻처럼 들렸다.
담 너머로 학원의 첫 번째 탑이 보였다. 안개가 완전히 걷혀서, 꼭대기의 커다란 에테르 결정이 아침 햇빛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흘 전, 루크는 저 빛을 여관 창문으로 올려다보며 잠들었다. 그때는 시험만 끝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가슴께의 펜던트를 한 번 쥐었다 놓았다. 붉은 보석은 조용했다.
'…내가 뭘 만든 거지.'
서한을 접어 품에 넣었다.
내일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