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의 빛은 늦게 왔다.
루크가 눈을 떴을 때, 여관 방의 작은 창은 아직 잿빛이었다. 침대 옆 바닥에는 어제 빌려 온 지팡이가 눕혀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물푸레나무. 장식 없음. 끝의 촉매석은 흐린 회색.
밤새 한 번도 자세가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루크는 일어나 앉아 그것을 집어 들었다. 어제 저녁에 쥐었을 때와 똑같았다. 가볍고, 매끈하고, 아무 느낌도 없었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기억한다고 했지.'
에드윈이라는 소년의 말이 떠올랐다. 열두 해를 쥔 지팡이라고 했다. 루크의 손안에 있는 것은 열두 시간째였다.
가방 옆 주머니에서 마이라가 깎아 준 목제 지팡이를 꺼내 함께 놓아 보았다. 촉매석이 박히지 않은 연습용은 시험장에 들고 갈 수 없다는 걸 어제 창구에서 이미 들었다. 그래도 나란히 두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2년 안에는 만들어야 할 텐데.'
루크는 목제 지팡이를 도로 주머니에 꽂고, 약재상 아주머니가 준 차의 마지막 한 줌을 우렸다. 뜨거운 김이 창문에 서리를 만들었다. 그 서리 너머로, 학원의 첫 번째 탑이 아침 안개 속에 흐릿하게 서 있었다.
남문 여관가에서 학원까지는 걸어서 반각 거리였다.
수험생들의 행렬이 대로를 메웠다. 대부분 말이 없었고, 몇몇은 걸으면서도 책장을 넘겼다. 루크는 그 틈에 섞여 걸었다.
정문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왼쪽에서 무언가가 어깨를 밀고 들어왔다.
"윽—"
"아."
부딪힌 상대는 루크보다 머리 하나쯤 작았다. 코발트블루 머리를 높이 묶고 큼직한 빨간 리본을 맨 소녀였다. 두 손으로 펼친 책을 받쳐 든 자세 그대로, 시선은 아직 책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신 나온 말은 이랬다.
"제가 부딪힌 게 아니라— 정확히는, 길이 갑자기 좁아졌어요."
"…네?"
소녀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이 루크를 보고, 그다음에 루크가 든 대여 지팡이를 보고, 마지막으로 다시 책으로 내려갔다.
"아, 죄송해요. 정말로요. 이 구절이 좀…"
"아델리아 양."
뒤쪽에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검은 베레모에 둥근 안경, 짙은 청록빛 단발 보브. 걸음이 조금도 급하지 않은데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오늘 세 번째예요."
"두 번째예요."
"기둥도 사람으로 세면 세 번째죠."
아델리아라고 불린 소녀는 반박하려다가, 반박할 말을 못 찾았는지 책을 탁 덮었다. 표지에 아무 글자도 없었다. 가죽이 검게 삭았고, 가장자리가 여러 번 다시 꿰맨 흔적으로 울퉁불퉁했다.
"…죄송해요. 다치신 데는 없죠?"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안경 쓴 소녀가 매끄럽게 웃었다. "가시죠, 아델리아 양. 착석 마감이 사반각 남았어요."
두 사람이 앞서갔다. 몇 걸음 가다가 아델리아가 고개를 젖혀 학원의 첨탑을 올려다봤다. 걸으면서 계속 올려다봤다.
이윽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네 번째네요."
"세 번째예요."
대강당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수백 명이 앉아 있는데도 기침 소리 하나가 천장까지 올라가 울렸다. 좌석은 수험 번호 순이었다. 루크의 번호는 뒤쪽에서 세 번째 줄, 창가에서 두 자리 안쪽이었다.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몇 사람과 스쳤다.
은백색 갑주는 앞쪽 중앙 어딘가에 있었다. 등을 곧게 세우고, 책상 위에 필기구를 자로 잰 것처럼 나란히 놓는 중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반대편 끝, 창가 맨 뒷줄.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천장을 보고 있었다. 시험지가 아직 배부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지루해 보였다.
챙이 넓은 모자는 보이지 않았다. 모자는 시험장 반입 금지였을 것이다. 루크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아침에 부딪혔던 코발트블루 머리는 루크의 두 줄 앞에 있었다.
그녀도 천장을 보고 있었다. 다만 블레이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대강당 천장에는 여덟 갈래로 갈라지는 아치가 있었고, 갈래가 만나는 자리마다 색이 다른 돌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붉은 돌, 푸른 돌, 흰 돌, 검은 돌.
여덟 개였다.
루크는 그 수가 원소의 수와 같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여섯 해 동안 배웠으면서도, 천장을 올려다볼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종이 울리고 시험지가 돌았다.
제1문. 에테르는 인공물에 깃들지 않는다. 그 이유를 서술하시오.
루크는 펜을 들었다. 엘리오 선생님이 첫 수업에서 했던 말이 그대로 떠올랐다. 에테르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물질에만 깃든다. 그때는 그냥 외웠는데, 여섯 권의 노트를 지나오며 이유를 몇 번 더 들었다.
제7문. 다음 배합의 오류를 지적하고 수정하시오. (물 원소 분말 3 / 안정화 결정 2 / 완충제 1)
루크의 손이 멈췄다.
틀렸다. 완충제가 너무 적었다. 이 비율이면 안정화 결정이 물 원소를 붙잡기 전에 반응이 먼저 올라간다. 손이 먼저 답을 적고, 머리가 뒤늦게 근거를 문장으로 옮겼다.
제19문. 연금술사는 자신이 만든 것의 쓰임을 어디까지 책임지는가. 논하시오.
여기서는 오래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까마귀가 한 번 울었다. 루크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마을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가장 먼저 나서던 사람. 그리고 어머니를 떠올렸다. 반지 하나를 만드는 데 사흘을 쓰던 사람.
모두가 필요한 걸 가질 수 있다면, 싸울 이유도 줄어들지 않을까.
루크는 그 문장을 적었다가, 한 번 그었다. 너무 쉬운 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만든 사람은 그것이 누구의 손에 갔는지까지 알아야 한다.
종이 다시 울렸다.
점심은 학원 안뜰에서 배급되었다. 딱딱한 빵과 콩 수프. 수험생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앉았고, 대부분은 먹으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루크는 회랑 기둥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수프 그릇에서 김이 올랐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드니 에드윈이 서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자세가 지나치게 반듯해서, 루크는 얼떨결에 옆자리를 손으로 쓸었다.
"네."
에드윈은 앉아서 자기 빵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한쪽을 먹고, 다른 한쪽은 손수건 위에 올려 두었다. 나중에 먹을 몫인 모양이었다.
"이론은 어떠셨습니까."
"제19문이 어려웠어요."
"윤리 서술 말이군요. 저는 규정을 인용했습니다."
"규정이요?"
"연금술사 등록령 제4조. 제작자는 제작물의 최초 인도자까지 책임을 진다."
루크는 잠깐 생각했다.
"최초 인도자까지만요?"
에드윈의 숟가락이 멈췄다.
"…법이 정한 선은 그렇습니다."
"그럼 그다음은요?"
에드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남은 수프를 한 번에 비우고, 손수건 위의 빵 반쪽을 도로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때 무언가가 회랑 기둥에 부딪혀 튕겼다. 반쯤 마른 빵 조각이었다.
"거기 둘. 밥 먹는데 무슨 법전을 읽어."
블레이가 회랑 반대편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빵은 이미 다 먹은 모양이고, 손에는 수프 그릇만 남아 있었다.
"음식을 던지는 것은 규정 이전에 예의의 문제입니다."
"안 맞았잖아."
"맞히려 하셨습니다."
"맞혔으면 사과했지."
에드윈이 입을 열려는 순간, 루크가 먼저 물었다.
"손목, 어떻게 됐어요?"
블레이가 그릇을 내렸다.
"…아침에 백 번 해봤다."
"어때요?"
"모르겠어. 근데 그 여자애 말이 맞더라. 손목만 신경 쓰니까 어깨가 이상해졌어."
블레이는 자기 오른팔을 한 번 흔들더니,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실기에서 보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에드윈이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 사람은… 위험합니다."
"왜요?"
"출력이 너무 큽니다. 그리고 자기 출력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실기장은 학원 뒤편의 넓은 석조 마당이었다.
수험생마다 개별 구역이 지정되었고, 구역과 구역 사이에는 옅은 푸른빛의 간섭 차단선이 그어져 있었다. 발끝으로 건드리면 물결처럼 흔들렸다. 옆 사람의 에테르가 넘어오지 못하게 막는 선이라고 했다.
루크의 구역은 열두 번째 열, 가장자리에서 세 번째였다.
첫 번째 과제. 방출 측정.
정면 십오 보 거리에 표적판이 세워져 있었다. 지팡이에 에테르를 실어 표적에 방출하고, 출력과 안정성을 측정한다. 시험관이 판 옆에 서서 기록판을 들었다.
"수험번호 사백일곱. 시작하십시오."
루크는 대여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
숨을 고르고, 손끝으로 에테르를 모았다. 이건 됐다. 여섯 해 동안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부분이었다. 따뜻한 것이 손바닥 안쪽에 고이는 감각.
그리고 그것을 지팡이로 밀어 넣었다.
에테르는 몸체 중간쯤에서 흩어졌다.
촉매석까지 가지도 못했다. 마치 물을 체에 붓는 것 같았다. 루크는 한 번 더 시도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흩어졌다.
"…한 번 더 해도 될까요."
"두 번까지입니다."
세 번째는 없었다. 기록판에 무언가가 적혔다. 루크는 그게 어떤 숫자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두 번째 과제. 성형.
지정된 원소 기호를 형성하고 간단한 술식을 구현하는 과제였다. 지정 기호는 흙 — 하향 삼각형에 원.
루크는 왼손으로 허공에 기호를 그렸다. 선이 그어지는 자리마다 옅은 빛이 남았다. 정확했다. 시험관의 펜이 한 번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어 그 기호에 에테르를 불어넣는 순간, 빛으로 그린 삼각형이 안쪽부터 무너졌다.
부분 점수. 시험관은 그렇게 말하고 다음 구역으로 걸어갔다.
루크는 무너진 기호가 있던 자리를 잠깐 바라보았다.
'왜 손으로는 되는데.'
그때였다.
쾅
공기가 한 번 통째로 밀렸다.
루크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오른편 여덟 구역쯤 떨어진 곳에서 붉은 기둥이 솟아올랐다가 옆으로 꺾였다. 표적판이 아니라 표적판을 세워 둔 석조 지지대가 통째로 날아갔다. 간섭 차단선이 그 압력을 받아내지 못하고 두 구역 분량이 한꺼번에 꺼졌다.
비명, 호루라기, 뛰는 발소리.
연기가 걷혔을 때, 그 한가운데에 붉은 머리카락이 서 있었다. 지팡이를 든 자세 그대로, 자기가 만든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쳇."
시험관 셋이 달려들어 그를 구역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블레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끌려 나가면서 딱 한 번 고개를 돌려 자기 오른쪽 손목을 봤다.
멀리서 누군가 낮게 말했다.
"저거 실격 아니야?"
"설비 파손은 감점이랑 근신이지, 실격은 아니래."
"근신이 낫나, 실격이 낫나."
루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방금 그 폭발이 터지기 직전, 에테르의 끝자락이 손목에서 한 번 꺾이는 것을 또 봤다는 사실만 마음에 걸렸다.
건너편 구역에서는 다른 광경이 지나갔다. 은백색 지팡이가 아래로 세워지고, 그 앞으로 반투명한 벽이 소리 없이 올라왔다. 시험관이 던진 세 발의 충격을 벽은 흔들리지도 않고 받아냈다. 에드윈은 벽을 세운 뒤 자세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저게 열두 해구나.'
세 번째 과제. 조합 실습.
각 구역의 작업대 위에 지급 재료가 놓였다. 물 원소 분말, 안정화 에테르 결정 세 알, 식물성 완충제, 계량 스푼, 소형 도가니. 과제는 기초 회복 포션 한 병.
시간은 사반각.
루크는 앉자마자 재료를 손끝으로 한 번씩 훑었다. 습관이었다. 어머니의 작업실에서 배운 것 중에 제일 먼저 배운 것.
세 번째 결정에서 손이 멈췄다.
겉으로는 다른 두 알과 똑같았다. 같은 크기, 같은 투명도. 그런데 안쪽에서 에테르가 고르게 돌지 않았다. 한쪽으로 몰려 있었다. 아주 미세한 균열이 결정 중심을 지나고 있었고, 그 틈으로 에테르가 계속 새어 나와 표면 아래에 고여 있었다.
이대로 도가니에 넣으면 물 원소와 만나는 순간 과포화가 한꺼번에 터진다. 도가니 하나로 끝날 양이 아니었다. 아까 차단선이 꺼지는 것을 본 뒤라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루크는 손을 들었다.
"저, 재료 교환을 신청하려면—"
"교환 신청은 개시 전까지입니다."
시험관은 루크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옆 구역에서도, 그 옆에서도 이미 도가니에 불이 올라가 있었다.
루크는 손을 내렸다.
'그럼 안 쓰면 되잖아.'
두 알만 쓰면 된다. 하지만 교본 배합은 결정 세 알을 전제로 한다. 두 알로는 농도가 모자라 회복 포션이 되지 않는다. 미완성으로 제출하는 것과, 옆 구역까지 날려 버리는 것.
'…아니야. 다른 방법이 있어.'
루크는 완충제 통을 끌어당겼다.
억제하는 게 아니라, 이미 새어 나온 걸 안전하게 태워 보내는 쪽으로. 마차에서 약재상 아저씨에게 했던 것과 반대 방향이지만 원리는 같았다. 완충제를 먼저 도가니 바닥에 얇게 깔고, 그 위에 물 원소 분말을 절반만. 불량 결정은 마지막에, 통째로가 아니라 부수어서.
계량 스푼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결정을 눌렀다. 균열을 따라 정확히 갈라졌다. 조각들이 완충제 위에 떨어질 때마다 아주 작게 치직, 소리가 났다. 새어 나와 있던 에테르가 완충제에 먹히는 소리였다.
남은 분말을 마저 넣었다.
거기서, 손끝이 저릿했다.
루크는 자기 손을 봤다. 왼손 중지의 붉은 반지가 아니었다. 반지는 조용했다.
가슴께였다.
두근.
옷깃 안쪽의 펜던트가 한 번, 크게 뛰었다. 여섯 해 동안 늘 조용히 따뜻하기만 했던 것이. 마차에서의 그 짧은 울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뭐야—'
손을 뗄 새도 없었다.
도가니 안의 액체가 위로 부풀었다. 끓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것에 가까웠다. 표면에 얇은 막이 서고, 그 막 아래에서 빛이 돌기 시작했다. 회복 포션이 되어야 할 무색의 액체가, 어머니의 작업실에서만 보던 빛을 머금었다.
루크의 구역을 감싸고 있던 간섭 차단선이 안쪽으로 휘었다.
옆 구역 수험생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하지만 차단선은 꺼지지 않았다. 부서지지도 않았다. 그저 루크의 작업대 쪽으로 천천히 빨려들 듯 기울었다가, 몇 박자 뒤에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게 전부였다.
소리도, 폭발도, 파손도 없었다.
도가니 안에는 액체 한 병 분량이 남았다. 무색이 아니었다. 아주 옅은 금빛이 액체 안에서 천천히 도는 중이었다.
루크는 그것을 내려다본 채 움직이지 못했다.
발소리가 몰려왔다. 시험관 하나가 도가니를 들여다보더니, 다른 시험관을 불렀다. 둘이 되고, 셋이 되었다. 누군가 측정용 결정을 액체 위에 갖다 대자 결정이 소리 없이 빛을 냈다.
"…이게 기초 회복 포션이라고?"
"배합표대로 했나?"
"배합표대로 하면 이게 안 나오지."
"수험생, 배합비를 말해 보십시오."
루크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정 하나가 불량이었다고 말해야 하는지, 완충제를 먼저 깔았다고 말해야 하는지. 그런데 그 말을 하려는 순간, 정작 자기가 왜 마지막에 그렇게 손을 움직였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배운 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실패한 것 같습니다."
시험관들이 서로를 봤다.
실기장을 나온 건 해가 완전히 기운 뒤였다.
회랑은 어두웠고, 벽에 걸린 에테르 등이 하나씩 켜지는 중이었다. 루크는 손을 씻고 나오는 길에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늦게 풀렸다.
지나가는 수험생들의 말소리가 조각조각 들렸다.
"열두 번째 열에서 뭐 터졌다며?"
"터진 건 여덟 번째 열이야. 열두 번째는 안 터졌대."
"안 터졌는데 시험관이 왜 넷이나 붙어."
루크는 벽에서 등을 떼지 않았다.
방출은 실패했다. 성형도 절반이었다. 조합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집에 뭐라고 편지를 쓰지.'
가슴께의 펜던트는 다시 조용했다. 손을 넣어 쥐어 보니 언제나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방금 그 울림이 정말 있었던 건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거요."
루크가 고개를 들었다.
회랑 반대편 기둥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챙이 넓은 모자가 없으니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다. 짙은 청색의 긴 머리가 어깨 뒤로 흘러 있었고, 큰 푸른 눈이 등불 아래에서 또렷했다.
칼라는 두 손으로 제출용 병을 안고 있었다. 자기 것을 반납하고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제 구역이 옆의 옆이었어요."
"아, 그럼 아까—"
"차단선이요."
칼라가 한 걸음 나왔다. 말끝을 흐리던 목소리가 거기서 끊겼다.
"안쪽으로 휘었어요. 밖으로 밀린 게 아니라. 차단선은 압력을 받으면 밀리거나 꺼져요. 휘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건 설계상 없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인데요."
"당신 쪽이 밀어낸 게 아니라, 끌어당겼다는 뜻이에요."
루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포션." 칼라의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옅은 금빛이 도는 회복 계열은 문헌에 세 개밖에 없어요. 전부 상급 촉매를 쓰는 것들이고요. 지급 재료로는 나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건 실패가 아니에요. 다른 게 나온 거예요."
"…저는 결정 하나가 불량이라서 배합을 바꾼 것뿐이에요."
칼라의 눈이 커졌다.
"결정이 불량인 걸 봤어요?"
"…네."
"어떻게요."
"안쪽에서 에테르가 한쪽으로 몰려 있었어요."
짧은 침묵이 있었다.
칼라는 안고 있던 병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로, 말끝을 다시 흐리며 물었다.
"…그거, 저한테 한 번만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 지금 말고요. 나중에… 시간 되실 때."
루크는 잠깐 그녀를 바라봤다.
회랑 끝에서 마지막 에테르 등이 켜졌다. 푸른빛이 두 사람 사이의 바닥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네."
칼라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병을 안은 채 걸어갔다. 몇 걸음 가다가 멈추더니, 돌아보지 않은 채로 덧붙였다.
"합격자 발표는 사흘 뒤예요."
"알아요."
"…그때까지 그 포션, 학원이 안 버렸으면 좋겠네요."
발소리가 멀어졌다.
루크는 회랑에 혼자 남아, 자기 손바닥을 한참 내려다봤다. 여섯 해 동안 지팡이에 아무것도 실어 보내지 못한 손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운 적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도 이 손이었다.
'너는 아직 네 그릇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엘리오 선생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위로가 아닌 다른 것으로 들렸다.
바깥에서 종탑이 울렸다. 여섯 번.
루크는 벽에서 몸을 떼고 회랑을 걸었다.
나가는 문은 오른쪽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왼쪽으로 꺾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쪽이었다. 발소리가 돌바닥에 크게 울렸다.
회랑이 끝나는 자리에 낡은 문이 하나 있었다. 다른 문들과 달리 옆에 에테르 등이 걸려 있지 않아 어두웠고, 문틀 위쪽에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절반쯤 닳아 읽히지 않았다.
그 앞에 사람이 둘 있었다.
한 명은 문틀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아침에 부딪혔던 그 소녀였다. 다른 한 명은 조금 떨어져 서서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델리아 양. 여긴 수험생 출입 구역이 아니에요."
"출입 금지라고 적혀 있지도 않은걸요."
"읽을 수 없게 닳은 거지, 안 적힌 게 아니죠."
"그럼 읽을 수 없으니까 모르는 거고요."
루크는 걸음을 멈췄다. 돌아서려는데, 문틀에 손을 댄 소녀가 이쪽을 먼저 봤다.
"아."
아델리아는 손을 내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아침에 그분이네요. 잘됐어요. 혹시 실기장 뒤쪽에서 구관으로 넘어가는 통로 못 보셨어요?"
"…구관이요?"
"옛 서고요. 학원 도면에는 남아 있는데 안내판에는 없어요. 이상하죠? 없앴으면 도면에서도 지웠어야 하는데."
"아델리아 양. 그 도면은 어디서 보셨습니까."
안경 쓴 소녀가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친절했다.
"…등록처 뒤쪽 벽에 붙어 있었어요."
"뒤집혀 있었죠."
"뒤집혀 있었어요."
"그럼 뒤집으신 거군요."
아델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틀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에 묻은 먼지를 치마에 문질렀다.
루크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옛 서고는 왜 찾으세요?"
아델리아가 루크를 봤다.
오늘 받은 어떤 시선과도 달랐다. 블레이처럼 재는 눈도 아니고, 칼라처럼 관찰하는 눈도 아니었다. 그냥,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줄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사람의 눈이었다.
"책이 저를 여기로 불렀거든요."
"…책이요?"
"네." 아델리아가 겨드랑이에 낀 검은 책을 조금 들어 보였다. "제가 자란 도서관 지하에 봉인돼 있던 거예요. 어느 날 저한테만 열렸고, 안에 이 학원 이야기가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왔어요."
"…시험 보러 온 게 아니라요?"
"시험도 봤어요." 아델리아가 조금 웃었다. "그건 여기 들어오려면 거쳐야 하는 절차니까요."
순서가 완전히 반대였다.
루크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가, 자기도 오늘 과제를 셋 다 망쳐 놓고 정작 마음에 남은 건 도가니 안의 금빛이라는 걸 떠올렸다.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아델리아예요."
"글레아입니다." 안경 쓴 소녀가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수험번호를 여쭤도 될까요."
"사백칠이요."
글레아의 미소가 아주 잠깐 그대로 멈췄다.
"열두 번째 열, 세 번째 구역."
"…네."
"안 터졌다면서요."
"…네."
"그렇군요." 글레아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안경을 손끝으로 한 번 밀어 올렸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사흘 뒤에 뵙죠."
두 사람이 회랑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아델리아는 가면서 한 번 더 낡은 문을 돌아봤고, 글레아가 그 어깨를 눌러 앞으로 돌려세웠다.
루크는 어두운 문 앞에 잠시 더 서 있었다.
닳아 없어진 글자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손을 뻗어 문틀을 만져 보았지만, 돌은 겨울 저녁의 다른 돌들과 똑같이 차가웠다. 가슴께의 펜던트도 조용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쪽으로 왔지.'
루크는 손을 내리고 돌아섰다.
이 도시에 도착하던 밤, 그가 아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어제 셋이 되었고, 오늘 다섯이 되었다.
시험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