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멘아크는 예상보다 훨씬 시끄러운 도시였다.
루크가 숙소 문을 나선 건 이른 오전이었지만,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넘쳤다. 내일이면 시작될 학원 입학 시험 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수험생들이 시내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도시 자체가 워낙 큰 편은 아니었지만, 루멘아크는 루미나 마법학원을 끼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이 계절에만큼은 제 몸집의 두 배는 되는 것처럼 팽창했다.
겨울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다. 내쉬는 숨이 하얗게 흩어졌고, 지붕마다 밤새 내려앉은 서리가 아침 햇살에 녹아 물방울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거리의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숙소가 밀집한 골목길을 지나자 학원 방향으로 이어지는 대로가 나타났다. 노점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고, 연금술 재료를 파는 상인들의 흥정 소리와 들뜬 수험생들의 대화가 김이 오르는 국물 냄새와 함께 뒤섞였다. 루크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흐름에 몸을 맡겼다. 에버힐에서 올라오는 동안 며칠을 걸렸던 탓인지, 도시의 밀도가 아직 몸에 익지 않았다. 발이 느렸다.
학원 등록처까지 이어진다는 대로를 따라 걷던 루크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멎었다.
광장 한쪽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비어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쪽 방향을 피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군중이 그 빈 공간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흘러갔다. 루크는 그 흐름을 거스르듯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불꽃처럼 위로 뻗친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광장 한복판에 홀로 서 있었다. 목에는 낡은 붉은 스카프를 둘렀고, 그 위로 검은 모피 칼라가 겨울바람에 흔들렸다.
에테르였다.
발아래에서 시작된 흐름이 소년의 몸을 타고 팔 끝으로 밀려가다가, 공중에서 날카롭게 산산이 흩어졌다. 한 번이 아니었다. 반복적으로, 정확하게,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폭파시키고 다시 모으고 또 흩었다. 찬 공기가 그 흐름을 따라 미세하게 떨렸고, 폭파될 때마다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피어올라 서리 낀 바닥을 적셨다. 사람들이 피한 건 위험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 무게감을 감당하기 싫었던 것이다.
루크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이어갔다. 빈 공간의 경계 어딘가쯤에서 본능적으로 발이 느려진 것 같기는 했지만, 그걸 의식하지는 않았다. 그쪽에서 뭔가가 보였기 때문에 그냥 보고 싶었다.
소년의 에테르가 팔 끝에서 폭파되는 순간, 루크의 눈이 그 흐름을 따라갔다.
흩어지고 있었다.
모였다가 폭파되는 직전, 에테르의 끝자락 약 삼분의 일이 방향을 잃고 허공으로 새어 나갔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구조 자체의 문제였다. 루크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보였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에테르가 흐르는 방향이, 새는 곳이, 막힌 곳이 그냥 눈에 들어왔다. 딱히 배운 게 아니었다.
"낭비가 많네."
혼잣말이었다. 루크는 그걸 말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한 박자가 걸렸다.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머리색과 같은 붉은 눈이었다. 치켜올라간 눈매가 겨울 햇살 아래 한층 날카롭게 드러났다. 눈이 마주쳤다. 루크는 피하지 않았다. 딱히 피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소년 입장에서는 그게 다르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루크는 잠깐 생각했다.
"낭비가 많다고요. 끝에서 새고 있어요. 매번."
소년의 눈썹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루크는 그게 화가 난 건지 의문을 가진 건지 판단이 잘 되지 않아서, 그냥 기다렸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만 있었다. 루크를 위아래로 훑는 게 아니라, 그냥 정면으로 보는 눈이었다. 무언가를 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단순히 멈춰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루크는 그걸 대화가 끝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걸음을 뗐다. 등 뒤에서 시선이 따라오는 느낌이 잠깐 있었지만, 걸음을 되돌릴 이유는 없었다.
등록처는 학원 정문에서 이어진 외벽 쪽 공터에 마련되어 있었다. 길게 늘어선 대기줄 너머로 학원의 첫 번째 탑 꼭대기가 보였다. 루크는 줄 끝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봤다.
수험생들의 분위기는 다양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 자세를 취한 이, 같이 온 일행에게 연신 말을 거는 이, 아예 서 있는 채로 소형 에테르 결정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는 이. 루크는 별 생각 없이 그 흐름들을 눈으로 좇았다. 에버힐에서 보던 에테르와 무언가 밀도가 달랐다. 색이 있었다. 투명하지 않고.
(저게 같은 또래라고.)
아까 광장에서 봤던 소년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루크는 자기가 에테르를 얼마나 다룰 수 있는지 새삼 떠올렸다. 엘리오 선생님에게 배운 기초 술식 몇 가지, 어머니의 작업실에서 어깨너머로 익힌 소형 변환 반응 정도. 저런 밀도의 에테르를 저렇게 자유롭게 올리는 건 루크로서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그때였다.
"—야, 비켜."
차갑고 거만한 목소리였다.
줄 앞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루크는 발꿈치를 들어 확인했다. 두 명의 남자 수험생이 줄 중간에 서 있었다. 고급 직물로 재단된 모피 외투, 가문 문장이 수놓인 소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러운 표정. 귀족 가문의 수험생이 분명했다. 그들이 줄 앞에 끼어들면서 원래 서 있던 수험생 한 명이 밀려났다.
"줄 서세요."
밀린 수험생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러나 두 남자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는 시간이 없거든. 너처럼 아무 가문도 없는 애들이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낮지만 또렷이 들리는 말이었다. 주변 수험생들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닿은 방향에, 아까 광장에서 봤던 붉은 머리카락이 있었다.
소년은 줄 중간 어딘가에 서 있었다. 귀족 수험생 중 한 명이 그를 지나치며 어깨를 의도적으로 스쳤고, 소년은 그 자리에서 그냥 걸음을 멈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멈췄다.
"…한 번만 더."
소년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무거웠다.
에테르가 올라왔다. 루크는 그걸 소리가 아니라 감각으로 먼저 알아챘다. 발바닥 아래 땅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 같은,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는 것 같은. 소년의 손끝이 반쯤 쥐어지며 에테르가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서리 낀 돌바닥 위로 옅은 김이 피어올랐다. 루크는 자기도 모르게 목에 걸린 펜던트를 손으로 잡았다.
군중이 물러섰다.
"공공장소에서의 에테르 운용은 입학 심사 기간 중 금지되어 있습니다."
목소리는 소년 옆에서 나왔다. 루크가 돌아보니, 은백색 판금 갑주에 금색 테두리가 둘러진 갑옷을 입은 수험생이 소년과 귀족 수험생 사이에 서 있었다. 옆으로 단정히 넘긴 밝은 금발 아래, 맑은 하늘색 눈이 흔들림 없이 정면을 향했다. 서 있다기보다는 자리를 잡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양쪽 다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면서, 양쪽 모두에게 그 말을 하고 있었다.
"당신들 둘 다요."
귀족 수험생이 눈썹을 올렸다.
"뭐라고? 나한테도?"
"지위와 무관합니다. 이건 절차입니다."
차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꺾이지 않았다. 갑옷 수험생은 귀족 수험생의 눈을 피하지 않았고, 붉은 머리카락 소년 쪽에도 동등하게 시선을 줬다. 누구 편도 아니었다. 그냥 원칙이 있고, 그걸 따르는 것뿐이라는 눈빛이었다.
루크는 그 순간 군중이 뒤에서 미는 압력을 느꼈다. 소란에 몰린 사람들이 앞쪽으로 쏠리면서 대기줄이 흔들렸고, 루크는 영문도 모른 채 두 걸음 앞으로 떠밀렸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갑옷 수험생의 정확히 옆에 세워졌다.
"어, 저—"
아무도 루크를 보지 않았다. 귀족 수험생과 소년은 갑옷 수험생을, 갑옷 수험생은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루크는 어중간하게 그 한가운데에 끼어 있었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해야 할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루크의 귀에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낮게,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꺼내면 제어를 잃어요. 계열 특성상."
루크가 고개를 돌렸다. 군중 가장자리에 서 있는 수험생이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짙은 청색의 긴 머리에, 챙이 넓게 퍼진 커다란 마녀모자. 그녀는 소년도, 귀족 수험생의 얼굴도 아닌 귀족 수험생의 손끝을 보고 있었다.
"그 에테르 구조, 밀도 과잉이에요. 선제 방출하면 반동이 본인한테 돌아와요."
아무한테도 하는 말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관찰 결과를 기록하듯 말하는 것 같았다. 감정도, 의도도 없이. 그냥 사실이니까 말하는 것처럼.
귀족 수험생의 손이 멈췄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 소년이 조용히 에테르를 거뒀다.
"…다음에."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귀족 수험생 쪽이었지만, 그게 협박인지 그냥 사실인지도 불분명했다. 귀족 수험생은 코웃음을 치고 돌아섰고, 그의 동행도 따라 돌아갔다. 소란이 가라앉았다. 군중이 서서히 흩어졌다.
루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갑옷 수험생이 루크를 돌아봤다.
"밀리신 겁니까."
"네."
"…무사하시면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줄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크는 그게 대화의 끝이라는 걸 이해하는 데 잠깐이 걸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딱딱하긴 하지만, 따뜻하거나 차갑다기보다 그냥 정직한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붉은 머리카락 소년이 루크 옆을 지나쳤다.
특별히 뭔가를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지나치는 경로였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나치는 찰나, 루크와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 광장에서처럼 즉각 차갑게 다가오는 시선은 아니었다. 뭔가를 다시 확인하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루크가 짧게 눈인사를 보냈다. 소년은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게 무시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군중이 다시 줄을 정비하는 동안, 루크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모자를 쓴 수험생이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이미 루크를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루크의 가슴 쪽, 목에 걸린 펜던트 쪽을.
루크는 본능적으로 펜던트를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가, 천천히 루크의 얼굴로 올라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손끝이 모자 챙에 한 번, 아주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루크는 그 눈빛이 아까 귀족 수험생의 에테르를 분석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아까는 에테르 구조를 보는 눈이었다. 지금은 루크를 보고 있었다.
"…수험생이에요?"
루크가 먼저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루크를 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려 걸음을 뗐다. 그걸로 끝이었다.
루크는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봤다가, 다시 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록처 창구를 거치고 나오니 오후가 기울고 있었다. 겨울 해는 짧았다. 루크는 등록 완료 확인증을 주머니에 접어 넣으며 대로를 걸었다. 내일 지참해야 할 물품 목록이 적힌 종이를 한 손에 쥐고, 남은 시간 동안 뭘 더 준비해야 할지 머릿속을 정리했다.
물품 목록에는 여덟 개 항목이 적혀 있었다. 필기구, 신분 확인증, 방한용 외투, 개인 연금술 주머니. 그리고 목록 맨 아래에, 다른 글씨체로 덧붙여진 한 줄이 있었다.
'지팡이 미소지자는 등록처에서 대여 신청 가능. 전날 오후 여섯 시 마감.'
루크는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가방 옆 주머니에는 마이라가 깎아 준 목제 지팡이가 꽂혀 있었지만, 그건 연습용이었다. 시험장에 들고 갈 물건은 아니었다.
재료점은 남문 여관가 초입에 있었다. 문 옆 게시판에 시험 안내문이 몇 장 겹쳐 붙어 있었고, 그 앞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은백색 갑주가 저녁 등불을 받아 옅게 빛났다.
"…저기."
갑옷 수험생이 돌아봤다. 낮의 그 눈이었다.
"낮에 밀리셨던 분이군요."
"네. 그… 이 목록에 적힌 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루크가 종이를 내밀었다. 갑옷 수험생은 장갑 낀 손으로 종이를 받아 눈으로 한 줄씩 훑었다. 급하지 않은 속도였다.
"대여 지팡이 제도입니다. 시험은 지팡이 시전을 전제로 하니, 본인 지팡이가 없는 수험생에게 학원이 규격품을 빌려줍니다. 신청은 등록처 오른쪽 세 번째 창구, 마감은 오늘 여섯 시입니다."
"…여섯 시요?"
"지금 마흔 분 남았습니다."
루크가 종이를 도로 받아 들었다. 갑옷 수험생이 덧붙였다.
"가시는 편이 좋습니다. 대여품은 손에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니, 오늘 밤에 한 번은 쥐어 보셔야 합니다."
"쥐어 보는 것만으로 달라지나요?"
"달라집니다."
그는 자기 왼편을 가볍게 짚었다. 허리 옆에 세워 든 지팡이가 있었다. 은백색 몸체 중앙에 파란 선이 흐르고, 끝의 촉매석 테두리는 금색이었다. 오래 쓴 물건 특유의, 손자국이 밴 광이 있었다.
"제 것은 열두 해째입니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기억합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에 다른 것이 섞였다. 자랑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심스러운 쪽이었다.
"…멋지네요."
"…감사합니다."
그는 한 박자 멈췄다가 덧붙였다.
"실례했습니다. 통성명이 늦었군요. 에드윈 아쉬크로프트입니다."
"루크예요. 루크 에버라이트 플라멜."
"플라멜." 에드윈이 그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루크 군. 기억하겠습니다."
"이름 주고받는 데 뭐 그렇게 오래 걸려."
목소리는 게시판 반대쪽에서 왔다. 붉은 머리카락이 등불 아래에서 한층 더 붉었다. 소년은 손에 종이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고, 그 안에서 마른 것이 부스럭거렸다.
에드윈의 자세가 반 뼘쯤 달라졌다.
"낮의 건은 마무리된 것으로 압니다만."
"너한테 온 거 아니야." 소년이 턱으로 루크를 가리켰다. "쟤한테 왔어."
루크가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저요?"
"낭비가 많다며."
그게 다였다. 소년은 그 말을 던져 놓고 대답을 기다렸다. 팔짱을 끼지도, 위협하는 자세를 잡지도 않았다. 그냥 서서 기다렸다.
루크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끝에서 삼분의 일쯤이요. 모았다가 터뜨리기 직전에, 흐름이 한 번 꺾여요. 꺾인 자리로 새요."
"꺾인다고?"
"손목에서요. 팔까지는 곧게 오는데, 손목에서 방향이 한 번 어긋나요. 그래서 끝이 흩어지는 것 같아요."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목을 반쯤 꺾었다가, 폈다가, 다시 꺾었다. 자기 손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쳇."
콧방귀였다. 그런데 화가 난 소리는 아니었다.
"이 몸이 육 년을 그렇게 썼는데, 아무도 그 말은 안 했다."
"아무도 안 봤을 수도 있어요."
"너는 봤고?"
"…보였어요."
소년의 눈이 잠깐 좁아졌다. 낮에 광장에서 마주쳤을 때와 같은 눈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이름."
"루크요."
"블레이." 소년이 짧게 말했다. "성은 없어. 묻지 마."
"안 물어볼게요."
블레이가 루크를 한 번 더 봤다.
"너, 이상한 놈이네."
"블레이 군." 에드윈이 끼어들었다. "낮의 건은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물러선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인정 안 해도 돼."
"인정은 상대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블레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에드윈을 봤다.
"…너 진짜 피곤한 놈이구나."
"자주 듣습니다."
재료점 문이 열리며 종이 딸랑거렸다. 나온 사람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품에는 갈색 종이로 싼 꾸러미가 두 개.
세 사람이 동시에 그쪽을 봤다. 그녀는 걸음을 멈췄고,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저는 그냥, 완충제를 사러…."
말끝이 흐려졌다. 시선이 세 사람 사이를 한 바퀴 돌았다.
"낮에," 루크가 말했다. "고마웠어요."
"…네?"
"그 말 안 했으면 저 사람 손이 안 멈췄을 거예요."
그녀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모자 챙에 손끝이 한 번 닿았다 떨어졌다.
"…밀도 과잉이었어요. 그냥 사실이라서 말한 거예요."
"손목이 문제라는 것도 봤어?" 블레이가 불쑥 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손목 아니에요."
세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봤다.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손목은 결과예요. 원인은 그 앞이에요. 팔꿈치에서 어깨로 올라오는 구간에서 이미 흐름이 두 갈래로 갈라져요. 손목은 그걸 마지막에 한 번 더 접는 것뿐이고요. 손목만 고치면 새는 자리가 옮겨갈 뿐이에요."
말이 빨랐다. 흐리는 말끝도 없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아." 루크가 말했다. "그러네요."
그녀가 루크를 봤다. 이번에는 펜던트가 아니라 얼굴을 보고 있었다.
"…보여요? 그게?"
"네."
그녀는 뭔가 더 물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꾸러미를 고쳐 안았다.
"…칼라예요."
"성은?" 블레이가 물었다.
"…그냥 칼라요."
블레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나랑 같네."
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모자 챙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골목 끝 종탑에서 종이 울렸다. 다섯 번.
루크가 튀어 오르듯 몸을 돌렸다.
"…죄송해요, 저 지금 등록처에 가야 해서요!"
"지금 출발하시면 십오 분 여유가 있습니다." 에드윈이 뒤에서 정확하게 말했다. "오른쪽 세 번째 창구입니다."
"감사합니다!"
루크가 달리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다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세 사람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서로 대화를 이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고, 실제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먼저 자리를 뜨지도 않았다.
루크는 다시 앞을 보고 달렸다.
대여 지팡이는 물푸레나무였다. 규격품답게 장식이 하나도 없었고, 끝의 촉매석은 흐린 회색이었다. 손에 쥐어 보니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리고 아무 느낌도 없었다.
여관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그 지팡이를 눕혀 놓고, 루크는 한참 그것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면, 별로 준비된 게 없었다. 에테르 운용 기초는 됐고, 엘리오 선생님에게 배운 연금술 공식 몇 가지는 외우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루멘아크에서 마주친 다른 수험생들과 비교하면 루크는 명백히 한참 아래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오늘 마주친 세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성을 묻지 말라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 양쪽 모두에게 똑같은 원칙을 들이밀던 갑옷 수험생.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말이 빨라지던 모자 쓴 수험생.
블레이, 에드윈, 칼라. 오늘 루크가 알게 된 것은 이름 세 개가 전부였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내일 시험장에서 다시 마주칠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루멘아크에는 루크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루크는 목에 걸린 펜던트를 한 번 손으로 쥐었다 놓았다. 손바닥 안에서 붉은 보석이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저물어가는 겨울 햇살이 그 위에서 잠깐 흔들렸다.
좋은 날로 시작한 길이었다. 오늘도, 아마 좋은 날이었다.
내일이 시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