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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나 마법학원

프롤로그 속 장면 5: 에버힐을 떠나며

5 / 8 챕터

출발 전날 밤, 나는 방 한가운데에 가방을 펼쳐 놓고 앉아 있었다.

챙길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물건 하나를 집을 때마다 자꾸 손이 멈췄기 때문이다.

책상 위의 연금술 필기 노트. 여섯 권. 첫 권을 펼치면 열 살짜리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에테르란 무엇인가'라고 적혀 있다. 엘리오 선생님의 첫 수업이었다. 여섯 권째의 글씨는 그래도 제법 사람 글씨 같아졌다. 나는 여섯 권을 전부 가방 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어머니 작업실에서 챙긴 재료 주머니를 얹었다. 물 원소 분말, 안정화 에테르 결정 가루, 완충제 몇 종. 어머니는 "학원에서 다 주는데 뭘 챙기니" 하면서도 결국 당신 손으로 제일 좋은 것들만 골라 담아 주셨다.

서랍 안쪽에서는 작은 목제 지팡이가 나왔다. 손바닥 두 뼘 길이, 손잡이에 삐뚤빼뚤하게 '루크'라고 새겨진. 여섯 해 전 생일에 마이라가 준 것이었다. 진짜 지팡이를 만들 수 있게 될 때까지의 연습용이라고 했었다. 나는 아직 마이라에게 지팡이를 만들어 주지 못했다.

'2년 안에는 만들어야 할 텐데.'

목제 지팡이를 가방 옆 주머니에 꽂았다. 자리를 꽤 차지했지만, 두고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가슴께의 펜던트를 만졌다. 이건 챙길 필요가 없었다. 6년 동안 단 하루도 목에서 풀어 본 적이 없으니까. 붉은 보석은 오늘 밤도 조용히 따뜻했다.

가방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안 올 줄 알았다. 긴장해서 밤새 뒤척이다가 퀭한 얼굴로 마차에 오르는 내 모습까지 상상해 뒀는데, 정작 눕자마자 눈이 감겼고, 다시 떴을 때는 창밖이 환했다.

맥이 빠질 만큼 좋은 날씨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방을 나서는데, 계단 아래 식당 쪽에서 벌써 소란이 올라왔다.

"마이라! 그거 오빠 꺼야!"

"맛만 보는 거잖아요! 조금밖에 안 먹었어!"

"조금이 어딨어. 반이 없어졌잖니."

"……반은 어머니의 과장이에요."

나는 계단 중간에서 웃음을 삼켰다. 식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마이라의 손에서 접시를 회수하는 중이었고, 아버지는 그 옆에서 아무것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양피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십수 년을 봐 온, 완벽한 모르는 척이었다.

"루크, 어서 앉으렴. 마이라가 네 달걀을 먹어버려서 새로 굽고 있어."

"저는 맛만 봤다니까요!"

"루크야, 미안해."

마이라는 내 쪽을 흘깃 보더니 잽싸게 시선을 돌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을 만들었다.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았다.

"괜찮아. 나 달걀 별로 안 좋아해."

"그거 거짓말인 거 다 알아."

"……맞아."

아침 식탁은 시끄럽고 따뜻했다. 어머니의 스튜, 어제저녁에 구워 둔 빵, 꿀 한 종지.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상차림이었다. 그게 오히려 좋았다. 오늘이 무슨 대단한 날인 것처럼 굴지 않아서.

아버지는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양피지를 내려놓고 나를 봤다.

"가방, 무겁지 않으냐."

"괜찮아요."

"가다가 무거우면 연금술 주머니부터 빼라. 어차피 학원 가면 다 준다."

"네."

그게 다였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기를 챙겼다. 아버지다웠다. 6년 치 걱정을 담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말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현관 앞에서 어머니가 내 로브 깃을 바로잡아 주셨다. 깃은 애초에 비뚤어져 있지도 않았다.

"먹을 것 챙겨 넣었으니까, 마차에서 배고프면 꺼내 먹고."

"네, 어머니."

"선생님들 말씀 잘 듣고."

"네."

"편지 보내는 거 잊지 말고."

"……네."

어머니는 한 번 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냥 웃으며 내 등을 두드리셨다. 손바닥이 두 번, 가볍게.

마이라는 현관 기둥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내가 신발을 신는 내내 말이 없는 게, 뭔가 고르고 있는 눈치였다.

"오빠."

"응?"

"……밥은 잘 챙겨 먹어."

고개를 들어 보니, 마이라는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고 있었다.

"그게 다야?"

"2년 뒤에 내가 학원에 가면," 마이라가 팔짱을 낀 채 또박또박 말했다. "그때 오빠가 밥 제대로 안 먹고 다닌 티가 나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알겠어."

"진짜로."

"알겠다고."

"남이 주는 이상한 포션 같은 거 받아 마시지 말고."

"그건 네가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마이라는 콧방귀를 뀌더니, 대답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문밖의 겨울 아침 공기가 차갑게 밀려들었다. 서리 앉은 풀밭이 햇빛에 하얗게 반짝였고, 내쉬는 숨이 희끄무레하게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춥지만 맑은, 길 떠나기에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몇 걸음 걷다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어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는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마이라는 끝까지 팔짱을 풀지 않다가, 눈이 마주치자 마지못한 것처럼 짧게 손을 들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앞을 봤다.

좋은 날이었다. 정말로.

루멘가르드의 수도 루멘아크까지는 마차로 나흘 거리였다.

가장 가까운 역참 마을까지 걸어가 합승 마차를 탔다. 마차 안에는 셋이 먼저 타고 있었다. 짐 꾸러미를 끌어안은 상인 하나, 나이 지긋한 약재상 부부, 그리고 혼자 여행하는 어린 수도사.

첫날과 이틀째는 조용히 지나갔다. 창밖으로 루멘가르드의 겨울 들판이 흘러갔다. 서리에 굳은 밭, 굴뚝마다 연기를 올리는 작은 마을들, 에테르 기관차가 지나는 철길. 상인은 코를 골았고, 수도사 소년은 기도문을 외다가 졸았다.

문제는 사흘째 오후에 생겼다.

"마부님! 잠깐, 잠깐 세워주세요!"

약재상의 아내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돌아보니 남편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노르스름하게 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 호흡은 얕고 빨랐다.

에테르 과잉 흡수. 에테르 결정이 많이 나는 지대를 지날 때 간혹 생기는 증상이었다. 체내 에테르 농도가 급격히 오르면 혈색이 변하고 호흡이 흐트러진다. 방치하면 혼절한다.

"에테르 포션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상인이 짐을 뒤졌지만 나오는 건 육포뿐이었다. 수도사 소년은 창백해진 얼굴로 기도문만 빨라졌다.

나는 가방을 열었다.

"제가 해볼게요."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무릎 위에 연금술 주머니를 펼쳤다. 어머니가 골라 담아 준 재료들 — 물 원소 분말, 안정화 에테르 결정 가루, 식물성 완충제.

'억제하는 게 아니라, 이미 들어간 걸 안전하게 내보내는 쪽으로.'

왼손 반지를 가볍게 깨웠다. 에테르가 손끝으로 모여드는 익숙한 감각. 재료를 손바닥에 조금씩 덜어 놓고 비율을 가늠했다. 체격은 큰 편, 호흡은 빠르고 얕다. 에테르 민감도가 높다는 뜻이었다. 완충제를 조금 더. 급하게 빼내면 오히려 탈이 나니까, 천천히, 부드럽게.

재료들이 옅은 빛을 내며 맞물렸다. 손바닥 위에 반투명한 구슬 하나가 맺혔다.

정식 포션에 비하면 순도가 낮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이걸 입에 물고 계세요. 삼키지 마시고, 녹을 때까지요."

약재상 아내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구슬을 받아 남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일 분쯤 지났을까. 노란빛이 돌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라앉고, 이마의 땀이 말랐다.

"……나, 괜찮아진 것 같은데."

"다행이에요."

약재상 아내가 내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도련님. 연금술 배우는 학생이에요?"

"네. 루미나 학원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에요."

"루미나요?" 상인이 육포를 문 채 눈을 크게 떴다. "거기 어렵기로 유명한 데 아닙니까?"

"그냥 한번 해보려고요."

주머니를 정리하며 손끝을 내려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팡이에 에테르를 싣는 건 6년이 지나도록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건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재료를 고르고, 배합을 조정하고,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 어머니의 작업실에서 수없이 반복했던 그대로.

'에테르에는 저마다 어울리는 그릇이 있단다.'

엘리오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위로인 줄 알았는데.

그 순간이었다.

가슴께에서, 무언가가 아주 짧게 두근거렸다.

손을 들어 펜던트를 쥐었다. 붉은 보석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그런데 방금 그 울림만은 — 내 심장인지, 돌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창밖을 봤다. 길가로 낮은 구릉이 이어질 뿐, 아무것도 없었다.

기분 탓이겠지.

나는 손을 내리고, 다시 창밖 풍경에 눈을 맡겼다.

나흘째 저녁, 루멘아크가 지평선 위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노을인 줄 알았다. 하늘 한쪽이 유난히 밝아서. 가까워질수록 그 빛은 도시의 것이 되었다. 수천 개의 창이 뿜는 불빛, 도심에서 피어오르는 에테르 기관차의 연기,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물든 거대한 성벽.

에버힐 전체를 들어다 놓아도 성문 하나를 못 채울 것 같았다.

"루멘아크예요."

수도사 소년이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속삭였다. 나는 대답하는 것도 잊고 창밖을 봤다.

마차는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성문을 통과했다. 성문 안쪽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거리 양쪽으로 에테르 가로등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기름 램프가 아니었다. 유리구 안에 담긴 에테르 결정이 스스로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에버힐에서는 어머니의 작업실에서나 볼 수 있던 것이, 여기서는 그냥 길바닥의 풍경이었다.

밤인데도 거리는 붐볐다. 짐마차와 사람들이 뒤엉켜 지나가고, 노점에서는 김이 오르는 무언가를 팔았고, 어디선가 악사의 연주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느 쪽을 봐야 할지 몰라서.

"학생, 숙소는 정했어요?"

약재상 아내가 다가와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험 보러 온 학생들은 다들 학원 근처 여관가로 가요. 남문 쪽으로 곧장 가면 되는데……."

그녀는 잠시 나를 보더니, 품에서 작은 종이 꾸러미를 꺼내 쥐여 주었다. 말린 약초 냄새가 났다.

"낮에 고마웠어요. 이건 몸 데우는 차예요. 시험 전날 밤에 마셔요. 잠이 잘 와요."

"감사합니다."

부부와 헤어지고, 나는 가로등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남문 쪽으로 걸었다. 여관가는 금방 찾았다. 나 같은 또래가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거리였다. 다들 어딘가 긴장한 얼굴로, 손에는 두꺼운 책이나 연금술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험생들이었다.

'다들 루미나를 보러 온 거구나.'

새삼 실감이 났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싼 여관에 방을 잡았다. 침대 하나, 작은 창 하나가 전부인 방이었지만, 창문 너머로 멀리 학원의 첨탑이 보였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첨탑 꼭대기의 커다란 에테르 결정이 등대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한참 그 빛을 바라봤다.

6년 전, 아버지가 늘 이야기하던 곳. 어머니가 젊은 시절을 보낸 곳. 그리고 모레 아침, 내가 시험을 치를 곳.

약재상 아주머니가 준 차를 우려 마시고 침대에 누웠다. 낯선 천장, 낯선 소음, 낯선 도시. 그런데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가슴 위의 펜던트가 언제나처럼 따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은 날로 시작한 길이었다. 이왕이면, 좋은 날로 이어졌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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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속 장면 5: 에버힐을 떠나며 - 루미나 마법학원 - Alen World